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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진들

시인과 아내
















기 차 를 타 고

아내가 살려달라며 울었다. 그러자 옆에서 누가 말했다:기차를 타세요.
기차를 타려면 삭발을 해야 한다고 했다. 나는 아내의
머리를 내가 사용하던 면도기로 밀어주었다.
여보, 나도 삭발하면 안될까. '주변머리'는 있는데 '소갈머리'가 없어서
전부터 전부 확 밀어버리고 싶었어: 안 돼요, 당신은 머리가 못생겨
보기 싫을 거예요. 둘 다 대머리로 다닐 수는 없잖아요. 아내는 우는것 같았다.
당신 머리는 내 머리와 달리 곧 다시 날 거야. 우리는 기차를 탔다.
아내가 말했다:늙으면 기차 여행을 실컷 하고 싶었는데 소원이 이렇게 빨리
이루어지다니. 기차는 우리를 싣고 달렸다. 아내는 기차가 나아가는 곳은 잊고
기차 밖 풍경을 보고 좋아했다. 나도 손에 책을 펼쳐 들고도 글은 한 줄도 읽지 않고
바깥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. 이렇게 기차 여행만 하고 평생 살 수는 없을까.
기차에서 내리지 않으면 안 될까. 기차는 소실점을 향해 달렸다. 아내는 달리는
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향해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.




달 팽 이

너는 서울에 가고 없고
내가 혼자 남아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니:
오늘도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.
셔터를 내린다.
도로시가 아직 셔터를 내리지 않았다(그렇다고 손님이 있는건
아니다. 처녀인 주인 여자는 홀 한쪽 구석 어디서 메뉴판에 그림을
그리거나 낙서를 하고 있겠지).
필레오는 손님 둘이 앉았다. 미네도 텅 비었다. 탁도희는 사우나에서
버티듯이 결연한 자세로 앉아 있다(:사실은 기다림과의 싸움이다. 끝까지
기다리는 자가 이긴다. 우리의 어머니들은 시장 바닥에서 푸성귀 몇 줌 놓고
기다리면서 우리를 대학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내지 않았던가).
토마토만 신학기에 맞추어 컴퓨터를 바꾼다고 분주하다.
한참을 망설이다 대학슈퍼에 들어가 막걸리를 두 병 샀다(늘 이런 식이다).

어두운 골목을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.

너는 서울에 가고 없고
아무도 없는 방으로 돌아와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니:

막걸리와 김치를 상에 차려놓고 닭 목을 낚아 채듯 벽에 기대놓은 기타를
낚아챈다(기타는 멍하니 앉아 있다 갑자기 멱살을 잡힌 놈처럼 속절없이 끌려온다).

너는 서울에 가고 없고
내가 혼자 어두운 방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니:

기타를 뜯는다:
기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안긴다:
기타를 안은 채 술잔을 들이켠다:
기타가 품 안에서 코 먹은 소리를 낸다.

내일도 어김없이 이 방을 나가 자전거를 타고 안민고개를 오를 것이다(예행연습이다).
그러나 이번에도 기타는 등에 메지 못할 것 같다(아직 기타가 등에 착 달라붙지 않는다).
언젠가는 기타 메고 자전거 타고 이 방을 떠날 것이다.

기타야 네가 말해다오.
너는 서울에 가고 없고
내가 혼자 남아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니.

..........김승강, 2번째 시집 '기타치는 노인처럼' 중



시인의 아내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.
어쩔 수 없는 선택, 임상실험....
정기적으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치료여행을 떠난다.
창원-서울은 먼 여정이다.
벌써 몇 년째.
처음에야 둘이 함께 했겠지만,
생업도 있고 하여이따금은 홀로 여행을 나서야만 하는
아내의 뒷모습을 봐야만 하남편의 마음은 어떠할까.
나는 잘 모르겠다.
익숙해 졌다면 그건 슬프고도 반가운 일인가.

시인은, 듬직한 풍채와 위엄있는 외모가 주는
느낌을 부드럽게 상쇄시켜 주는 허허로운 웃음을
지니고 있다. 정확한 표현은 힘들다. 그런 느낌...

시인의 아내는 늘 밝고 명랑해서같이 차라도
한 잔 나누고 돌아설 때는얼굴에 묻은 웃음을 그대로
묻힌채나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.
힘든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그 기본적 바탕이 크게
바뀌지 않았음에 조금은 놀랐다. 다행이다.

요즘, 시인은 기타를
그의 아내는 우쿨렐레를 독학하고 있다.
둘이 함께 앉아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픈데
그 모습이 참 근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.
꼭 무슨 사연이나 곡절이 없더라도 말이다.